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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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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정숙 . . . . 33회 일치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1924년]] [[5월]]의 [[조선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의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세상이 귀찮아 중이나 되겠다고' 단발했든(조선일보 1924년 7월 21일자),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강제로 삭발을 시켰든(1923년 12월 13일자), 여성의 단발은 빠짐없이 기사로 소개됐다. 군산 기생 강산월(康山月)이 더 이상 '유산계급 노리개'를 할 수 없다며 단발했을 때는 박스기사로 크게 소개됐다.(조선일보 1925년 3월 20일자)<ref name="chossdd"/> 그러나 [[단발령]]을 최대의 불효와 패륜으로 규정한 [[성리학]]자들은 그가 사회를 금수처럼 만들려 한다, 뉘집의 딸이냐며 비방하였다. 단발 운동을 지지, 주도하던 그는 [[1925년]] 다시 공개 단발을 감행한다.
         [[1925년]] 허정숙은 '[[화요회|신사상 연구회]]'(후일의 [[화요회]]로 개명)에 가입하였고, [[1925년]] [[4월]]에는 [[경성]]에서 [[사회주의]] 활동가인 [[박헌영]]등과 [[안티 기독교]] 공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가,[[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강연회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을 피해 한동안 은신하기도 했다. [[1926년]] 5월[[미국]]으로 유학할 때까지 그는 각종 [[안티 기독교]] 강연에 참여하였다. 그 뒤 [[송봉우]]와 한때 동거하기도 했다.
         허정숙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가 필요함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의 참여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여성동우회]]의 주요 멤버로,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직접 참여는 않았지만 그는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ref name="shinyoung143"/>
         [[1925년]] [[1월]] [[화요파]]는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서울파는 [[경성여자청년회]]를 결성했다.<ref name="yeosong182"/> 허정숙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창립에도 참여,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허정숙은 세 단체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합심, 협력을 것을 호소하며 통합, 연대를 추진한다.
         [[1925년]] [[1월]] 초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월]] 여성동우회가 경성여자청년회계와 신사상연구회계의 계파싸움 끝에 분열되었다. 여성동우회의 분열로 허정숙은 [[경성여자청년동맹]]으로 건너갔다. [[1월 17일]] 친경성여자청년회계로 조선여자강습소를 운영하던 [[김현제]](金賢濟)와 [[대한애국부인회]]의 이정숙(李貞淑) 일파, 그리고 [[주옥경]](朱鈺卿) 등 [[천도교]] 신파의 여성운동단체인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 등의 주도로 [[여성해방동맹]](女性解放同盟)이 결성되자 [[여성해방동맹]]에도 창립 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허정숙은 분열은 세력의 약화를 꾀한다며 [[경성여자청년동맹]]과 [[여성해방동맹]]의 통합과 협력을 설득하였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 부녀부 기자,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당시 잡지사에는 많은 여기자가 있었지만 신문사 여기자는 허정숙 외에는 김경숙(金慶淑 또는 金敬淑) 외에는 거의 없어서 주목받기도 했다. [[동아일보]] 입사 초반 그는 [[인도]] [[국민회의]]의 의원이며 시인인 [[사로지니 나이두]]의 [[영문]]시를 한글로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학예부와 부녀부, 사회부를 동시에 맡았지만 그는 모두 소화해냈고, 남자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산악과 교통편이 불편한 농촌 현장의 취재에도 직접 뛰어다녔다. 이때 그의 남편 [[임원근]] 역시 [[동아일보]] 기자로 있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부가 한 신문사에서 근무하였다.
         [[동아일보]]의 여성담당, 학예담당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25년]] [[1월 21일]]에는 [[주세죽]], [[박정덕]]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조직하여 경성여청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주말에는 각 친목회의 주말 조기축구나 야구회에도 나가 남자 회원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인맥을 쌓기도 했다.
         [[1925년]] [[3월 8일]] 전 세계 무산자 부녀들의 기념일인 [[세계 여성의 날|국제무산부인데이]](國際無産婦人紀念日) 기념행사에 참석하였다. 3개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경성여자청년회]] 등의 연합주최로 [[천도교]] 기념관 내에서 열린 기념대강연회에서 그는 [[김조이]], [[박희자]], [[주세죽]], [[박원희]], [[김희자]] 등과 함께 연사로 참석,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의 의의와 여성운동'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인용문2|[[3월 8일]]은 무산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오래인 성상(星霜)동안에 여러가지로 미명(美名)의 마수제(魔睡劑)를 가지고 횡포와 우월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부르조아]] 계급에게 굴종을 인종(忍從)하며 살아오던 부녀의 무리가 전제정치와 자본계급에 반항하여 맹연히 분기한 날이다. 이리하야 부녀들은 규율있는 조직하에서 자아의 진용을 정제하고 여성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며 일반 부녀들에게 계급적 각성과 해방적 의식을 갖게 하야써 인간으로서의 부인의 지위와 인권을 찾게 하는 날이다.|[[동아일보]] [[1925년]] [[3월 9일]]자}}
         [[1925년]] [[5월]] [[박헌영]]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 의 [[임금 (경제학)|임금 인상 투쟁]]에 가담하면서 [[1925년]] [[5월]] [[박헌영]]과 함께 기자직을 그만두었다. 그 뒤에도 [[1932년]]까지 그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송고하였다. 20년대 중반 그는 여성동우회·근우회·화요회·여자청년동맹 등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주의]][[여성운동]]과 반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8월]]에는 [[주세죽]], [[김조이]] 등과 함께 [[경성부]] 시내에서 가위를 들고 공개 단발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기자들이 몰려와 이들의 공개 단발은 신문과 잡지에 보도되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사상을 고수하던 유학자들은 이들의 행동을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각이라며 질타하였다.<ref>[[1920년]]대까지만 해도 유교 사상가들 중 상당수는 [[조선 고종|고종]]때의 [[단발령]]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품고 있었다.</ref>
         [[1924년]] 그는 [[기독교]]가 사회를 진작하지 않고, 오히려 [[유교]]만큼이나 수구적이며 인간을 노예화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기독교]]를 비판, 규탄하는 강연 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1924년]], [[1925년]] 그는 필명 '정숙'이라는 필명으로 [[삼천리]], [[신여성]] 지 등에 [[기독교]] 비판 칼럼을 발표하였다.
         {{인용문2|[[조선]]의 여자 교육의 시설과 그 방침이 저질이요 수구적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더욱 [[기독교]]측 설립의 학교교육의 시설과 그 방침이야말로 무던히도 [[하나님|한우님]]의 명령대로 복종한다면 (생략) [[조선]][[여학교]] 중 그 시설과 방침이 무리에서 떨어지고, 시대에 뒤쳐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피교육자에게 강제로 [[예수]]를 주입하여 사람(여성)이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도 통분한데다가, 정체를 알 수 없고 과학이 버리는 신의 노예를 만들 양으로 하는 것이라던지, 그 학교학생으로서 성실한 신자가 아니면 선생의 귀애(貴愛)와 친절한 지도 보담은 일종의 이단자로 취급하는 행동과 심사는 가증하기가 끝이 없다. 대체 제군들의 조선여자교육의 본의가 거대한 신도 명부 작성에 있느냐, 현실살이 사람 교육에 있느냐<ref>상허학회,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2004) 257페이지</ref>|정숙, "착오된 교육방침" 《신여성 1925년 11월호》 29쪽}}
         [[1925년]] [[10월 25일]] [[기독교|기독교계]]가 준비한 [[전조선주일학교대회|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방편으로 [[한양청년동맹]] 등의 주최로 '반기독교대강연회'가 개최되었다.<ref name="gassin">[http://100.naver.com/100.nhn?docid=328799 반기독교운동]</ref> 강연에는 [[박헌영]](朴憲永)의 '과학과 종교', [[김장현]]의 '지배계급과 기독교', [[김단야]]는 '기독교의 기원', 홍순준(洪淳俊)은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는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 허정숙의 '[[현하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害毒)' 등의 주제로 강연이 열렸다.<ref name="gassin"/> 그는 연단에서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해악과 독이라며 [[기독교]]가 노예화를 촉진시켰다며 비판하였다. 허정숙은 [[기독교]]가 지나치게 인간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는 점과, 수동성과 타율성을 강요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강연이 있기 전 [[기독교]] 계열의 밀고로 출동한 일제 경찰당국에 의해 해산되고 그도 경찰의 시선을 피해 피신하였다.
         그는 가정이 과연 여성과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는가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1925년]] [[11월]] 허정숙은 [[신여성]]지에 '가정은 지옥<ref name="hanmin111">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편, 《한민족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98) 111페이지</ref>'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것은 오래 예전부터 구속과 압박 밑에서 자유 없이, 오직 노예의 생활을 하고 지나왔습니다. [[가정]]이라는 [[지옥]] 속에서 [[남편]]의 [[노예]], [[부모]]의 [[노예]], [[자식]]의 [[노예]], [[예의]][[도덕]]의 노예, 가사노동의 노예, [[경제]]의 노예로써 이중 삼중의 노예로 있던 것은 (지금까지의) 사실이 [[웅변]]으로 증명"한다고 하였다.<ref name="hanmin111"/>"
         [[1925년]] [[10월]] [[신여성]]지에 입사하여 《[[신여성 (잡지)|신여성]]》지 편집부 기자가 되었다. 여기서 [[김일엽 (승려)|김일엽]] 등을 만나 교분을 쌓게 된다. 그러나 자유로운 연애, 자유로운 남녀 관계를 주장하던 [[김일엽 (승려)|김일엽]]과 달리 허정숙은 남자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어느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개벽사 《[[신여성 (잡지)|신여성]]》지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신여성 (잡지)|신여성]]》의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신여성 (잡지)|신여성]]》지 편집 책임자로 옮긴 그는 논설, 편집, 인쇄교정에 이르기까지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ref name="shinyoung137"/> 그는 홀로 편집과 인쇄 교정 외에도 신문용지로 보급되는 종이의 재질을 검사하여 [[종이]]의 질이 좋고, 나쁘고를 판별해냈다.
         《[[신여성 (잡지)|신여성]]》지의 기자, 편집, 인쇄교정, 종이재질 검수를 하면서도 [[동아일보]] 객원칼럼니스트 활동과 [[여성동우회]] 활동에도 게을리하지않았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에 그는 직접 참여는 않았다.<ref name="shinyoung143"/> 그러나 그는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ref name="shinyoung143"/>
         [[1925년]] [[8월]] 허정숙은 [[주세죽]], [[김조이]]와 함께 [[경성부]]에서 공개적으로 가위를 들고 단발을 감행했다. 이는 화제가 되어 기자들이 취재를 하기도 했다. 그 날의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1925년]] 당대의 여성 명사이자 '주의자(主義者)'인 [[주세죽]](朱世竹) 허정숙(許貞淑) [[김조이]](金祚伊) 3명이 한꺼번에 단발을 감행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종래 제도의 구속을 타파하고, 부자연한 인습을 개혁'한다는 이유에서다.(조선일보 1925년 8월 22일자)'고 보도하였다. [[8월 23일]]자 [[조선일보]] 시평(時評)란은 "외국에 잇서서는 이미 진부한 사(事)"이나, "우리 조선에 잇서서 단행한 그 용기는 다대타"고 논평했다.<ref name="chossdd"/> 그리고 단발 운동의 홍보와 단발의 위생성, 편리함 등을 홍보하고 다녔다.
         당시 [[조선]]사회는 '(사회)주의자'나 '기생'의 단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ref name="chossdd"/> "…이 댐에 출가한 후에 남편이 술먹고 주정하면서 머리채 끄들며 때릴가 하야 예방주사로 깍어버렸소. …끌채를 안 잽히려거든 빤빤히 삭발하시야…"처럼 빈정거리거나(조선일보 1925년 11월 7일자), '단발하면 후년(後年) 대머리(禿頭)가 된다'는 외신기사가 소개됐다.(조선일보 1927년 5월 3일자) 허정숙은 이러한 단발 반대 기사를 근거없는 편견이라며 서양 여성들의 단발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 박준규(1925) . . . . 10회 일치
         ||<width=30%><:> 제2~3대 [br] [[박정희]] ||<width=5%><:> → ||<width=30%><:> 권한대행 [br] ''' 박준규 ''' ||<width=5%><:> → ||<width=30%><:> 제4대 [br] [[김종필]] ||
         ||<:> 제7대 [br] [[윤길중]] ||<:> → ||<:> 제8대 [br] ''' 박준규 ''' ||<:> → ||<:> 제9대 [br] [[박태준]] ||
         [[1925년]] [[9월 12일]] ~ [[2014년]] [[5월 3일]]
         [[1925년]] 9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출생하였다[* 일명 '묘골마을' 이라하는 순천박씨 집성촌. 현재 묘골에 있는 [[박팽년]] 등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 앞에 그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경북고등학교|경북중학교]] 및 구제 마쓰야마[[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구마모토 [[의과대학]] 재학 중에 [[8.15 광복]]을 맞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으나, 동 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였고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은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1928)|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박준규, version=85)]
  • 이만섭 . . . . 7회 일치
         |전임자 = [[박준규 (1925년)|박준규]]
         |전임자 = [[박준규 (1925년)|박준규]]
         |전임자 = [[박찬 (1925년)|박찬]]·[[한병채]]
  • 서훈 (1942년) . . . . 6회 일치
         [[대한민국 제13대 총선|13대 총선]]에서는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대한민국 제14대 총선|14대 총선]]에서는 [[통일국민당]] 공천으로 출마해 낙선했으나, [[1993년]] [[문민정부]] 초기에 [[공직자 재산공개]]로 [[박준규 (1925년)|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이 의원직 사퇴를 선언해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노동일]] 후보에 신승하면서 국회에 입성한다. 당시 지역감정이 억세기로 소문난 대구 지역 유일의 무소속 당선자여서 화제를 모았고, 자전거를 타고 국회에 출근하며 타 국회의원들이 언급하기 꺼려하는 국정사항에 대해 과감하게 질의하는 등의 소신 행보로 화제를 모은다.
         |전임자 = [[박준규 (1925년)|박준규]]
  • 정칠성 . . . . 6회 일치
         유년 시절에 기녀가 되어 “금죽”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고, 후일 필명이자 아호로 사용하였다. 기생학교에서 수료한 후 한남권번의 기생으로 있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여성들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였고, [[일본]] 유학 중 1925년 도쿄에서 여자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했다.
         10월 이춘수와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대구여자청년회의 창립은 당시 종교단체외에 여성운동을 조직적으로 하는 단체가 없던 상황에서 여성대중을 대상으로 조직을 결성한 첫 시도였다.<ref name="dispose"/>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의 부녀단체를 탐방, 연구한 정칠성은 전국적인 여성 단체, 여성 청년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후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大邱女子靑年會執行委員)이 되어 [[1925년]] [[3월]]까지 대구여청에서 활동하였다.
         정칠성은 정종명, 오수덕 등과 함께 종래의 소극적 여성운동을 극복하고자 여성해방단체조직에 착수하였다.<ref name="dispose"/>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란 생소한 것이었기에, 정칠성은 일반 부인을 대상으로 직접 회원모집에 나섰다.<ref name="dispose"/> 이후 그는 각지의 순회강연과 칼럼, 기고를 통해 여성 계몽운동에 나섰고, 경성에서 다른 여성단체의 일을 보면서도 [[1925년]] [[3월]]까지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을 겸직하였다. [[1924년]] [[7월 20일]]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인천노동총동맹회 상무위원(仁川勞働總同盟會常務委員)에 선출, 겸임하였다. 또한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 일도 겸하였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체류 중,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삼월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8일]] [[대구]]부내 노동공제회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주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 기념행사에 연사로 초빙되어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3월 22일]]에는 [[대구청년회관]]에서 경북지역 인사들이 모인 사회주의 연구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31일]] 다시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여자기예학교]]에 복학하였다.
         [[1925년]] [[11월]] [[일본]] 정부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하여 각급 중고등학교에 군사훈련 및 각종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정칠성은 군사교육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1월 7일]] [[홋카이도]]의 소준고등학교 강당에서 일본내 시민단체, 여성단체, 사회주의 운동단체 및 조선인 유학생단체, 삼월회, 일월회(남성 단체) 공동 주최로 열린 [[군사교육 반대 집회]]에 그는 [[삼월회]]의 대표 자격으로 박경희(朴慶姫)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 2백 명이 급히 투입되어 진압하자, 바로 피신하였다.
  • 현진건 . . . . 4회 일치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 〈[[B사감과 러브레터]]〉(단편소설,[[1925년]])
         * 〈[[할머니의 죽음]]〉(단편소설,[[1925년]])
  • 백남억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에 다섯번 당선되었으며,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송산 [[박준규(1925)|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자형(姉兄)이 된다. [[종교]]는 [[불교]]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이때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당무의원을 지냈다.
  • 이효상 . . . . 3회 일치
         |후임자 = [[박준규 (1925년)|박준규]]
  • 김윤환 . . . . 2회 일치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의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1925)|박준규]]와 [[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김영삼은 김윤환을 통해 당과 범여권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낀다. 이에 김윤환은 다시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민자당 대표위원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하게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도 김윤환은 대표위원으로 유임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 대구광역시/인물 . . . . 2회 일치
         * [[박준규(1925)|박준규]] - 달성군
  • 박근혜 . . . . 2회 일치
         '''박근혜'''(朴槿惠<ref>{{헌정회|2530}}</ref>,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group="주">192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 대통령까지 포함할 경우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 모 [[육영수]] (陸英修, [[1925년]] ~ [[1974년]])
  • 진종채 . . . . 2회 일치
         [[1925년]] ~ [[1998년]]
         1925년 [[경상북도|경북]] [[포항시|포항]]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한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8기로 졸업했다.[* 진종채를 군내 요직에 중용했던 [[박정희]]도 대구사범과 육사를 함께 졸업했다.] [[김종필]], [[김형욱]]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동기다. [[서종철]], [[노재현]], [[윤필용]] 등과 함께 [[전두환]] 등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에 숙청된 윤필용과 달리 진종채, 서종철, 노재현은 [[10.26 사건]] 때까지 군에 영향력을 행사, 영남 군벌 3인방으로 불렸다.]
  • 하시다 스가코 . . . . 2회 일치
         '''하시다 스가코'''({{lang|ja|橋田 壽賀子}}, 1925년 5월 10일 -)는 일본의 [[각본가]]이자 [[극작가]]이다.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오사카부]] [[사카이 시 (오사카 부)|사카이 시]] [[니시 구 (사카이 시)|니시 구]]에서 자랐다. 본명은 이와사키 스가코({{lang|ja|岩崎 壽賀子}})로, 하시다는 결혼 전 성이다.
         [[분류:192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영화 각본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일본의 텔레비전 각본가]][[분류:기쿠치 간상 수상자]][[분류:일본여자대학 동문]][[분류:사카이시 (오사카부) 출신]]
  • 한영이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한영이 막달레나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함병춘 . . . . 2회 일치
         * [[이범석 (1925년)|이범석]]
         |전임자 = [[이범석 (1925년)|이범석]]
  • 허협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허협 바오로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현경련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현경련 베네딕타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현석문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현석문 가롤로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현정건 . . . . 2회 일치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ref>「上海淸年同盟 宣言問題 解決」, 『동아일보』1925년 1월 9일자.</ref>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 홍금주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홍금주 페르페투아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홍병선 . . . . 2회 일치
         홍병선이 귀국한 해에 과거 경성학당 교장이었던 일본조합교회의 와다세(渡賴常吉)가 정식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에 파견되어 왔고, 홍병선은 와다세가 설립한 한양교회의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동시에 [[보성전문학교]],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배화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2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0년]]부터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소년부 간사를 맡아 이후 여생을 YMCA 운동과 함께 보냈다. 특히 [[1925년]] 농촌부 간사가 되면서 농촌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YMCA의 농촌운동은 당시 YMCA 총무이던 [[신흥우]]의 지원을 받았으며, 개량적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 홍병주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홍승목 . . . . 2회 일치
         '''홍승목'''(洪承穆, [[1847년]] [[음력 10월 11일]] ~ [[1925년]] 양력 [[2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계동이다.
         [[분류:1847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
  • 홍영주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1회 일치
          1925년 맺어졌던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한다. 불만도가 0.5% 감소하며 메츠, 콜마르,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오이펜을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든다. 호전도가 1 오르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와의 관계도가 -5 하락한다.
  • 김성곤 . . . . 1회 일치
         1922년에 현풍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 대구로 이사하여 달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며, 4학년 때 교내 항일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성곤 (1913년) . . . . 1회 일치
         * [[1925년]] 달성보통학교 편입
  • 배성룡 . . . . 1회 일치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 소진은 . . . . 1회 일치
         [[1921년]]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경부에 임명되었으며, 왜관경찰서 경부로 발령받은 뒤부터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1922년 ~ 1923년), 포항경찰서(1925년 ~ 1929년)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1930년 ~ 1931년)로 근무하면서 정치범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경상북도 경찰관교습소 교관으로 활동했고, [[1933년]] [[5월 12일]]에는 도경시로 승진하면서 전라북도 경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때부터 전라북도 순사교습소장, 순사징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 손전 . . . . 1회 일치
         '''손전'''(孫全, [[1910년]] [[1월 27일]] ~ [[1999년]] [[9월 8일]], 본명: '''손병철''', 孫秉喆)은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 [[제작자]], [[영화감독|감독]]이다. 손전, 손일포, 한일호 등의 예명을 사용하였다. [[1925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대구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으며, [[1930년]] [[니혼 대학]] 경제학과를 중퇴했다. 총 1천 5백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 스틸오션/일본 . . . . 1회 일치
         >토사급은 1920년대 초반에 88함대의 일각으로 주문된 고속전함이었다. 토사급의 원래 목적은 나가토급 전함의 후계자였다. 하지만, 워싱턴 해군 조약에 의해 건조중이던 토사급 두척의 건조가 취소되었다. 카가는 지진으로 파괴된 아마기를 대신하기 위해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다. 토사는 장갑 성능 실험용으로 사용된 후 1925년 자침되었다.
  • 이각종 . . . . 1회 일치
         [[1925년]] 6월부터 1930년대 초 중반까지 잡지 《신민(新民)》의 발행 겸 편집인을 맡았다. [[1936년]] 2월 전향자 출신 인사들이 결성한 황국신민화 단체인 백악회(白岳會)를 조직했고 같은 해 7월에는 백악회를 확대 개편한 단체인 대동민우회를 조직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 촉탁과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를 겸직하는 한편 1937년 이후부터 시국강연회, 시국대응강연회, 시국유지원탁회의 등에 참석하여 국민정신총동원과 내선일체를 적극 주장했다.
  • 이갑성 . . . . 1회 일치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ref>김준엽, 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ref>
  • 이상화 (시인) . . . . 1회 일치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27년]]에는 [[의열단|의열단원]]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 이인 . . . . 1회 일치
         이후 [[장택상]] 등과 고학생의 상조(相助)기관인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興農社) 사건을 변호하다 [[재판정|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 혐의로 6개월 동안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 이장우 (1871년) . . . . 1회 일치
         [[1909년]]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으로 임명되었으며 [[대구은행]] 창립 발기인(1912년 12월)과 대구지주조합 창립위원(1913년 5월), 대구자제단 발기인(1919년 4월 7일)으로 참여했다. 대구은행 감사역(1915년)과 경일은행 감사역(1918년, 1925년 ~ 1927년), 대구주조주식회사 취체역(1919년 10월 3일 ~ 1921년), 대구상업회의소 상무위원(1919년 12월 16일)으로 근무했고 대구부 도시계획 위원회 제6부 위원(1923년 1월 30일)과 대구상업회의소 특별위원(1926년)을 역임했다. [[1918년]] 7월과 [[1920년]] 12월 대구부 협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 10월과 [[1930년]] 7월 대구소년보호소에 5,000원을 기부했다.
  • 이장희 (시인) . . . . 1회 일치
         시인 생존시에 이루어진 평으로는 [[박종화]]와 [[이상화 (시인)|이상화]]의 것이 있다. 박종화는 《조선문단》 1925년 10월호 〈9월의 시단〉에서 《여명》에 실린 이장희의 시〈청천의 유방〉과 〈비오는 날〉을 평가하면서 〈청천의 유방〉은 "기괴를 쓰랴는 마음, 상징을 위한 상징시라는 것을 나는 말할 뿐이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하고 말했으며, 〈비오는 날〉은 "작자에 착각적 정서로부터 나온 작품이다. 다만 한 때에 마취된 감흥의 씌운 붓장난이라 할 것이다."하고 혹평했다.<ref>이기철, 〈이장희 연구(1)〉, 《인문연구》6권,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4, 179쪽</ref> 반면, 이장희와 동향 친구였던 이상화는 같은 해, 《개벽》 6월호에서 이장희의 시 〈고양의의 꿈〉과 〈겨울밤〉을 이채 있는 시라고 하면서, 이상화를 정관(靜觀)시인이라고 고평하였다. 다만 생명에서 발현된 열광이 없음을 덧붙였다.<ref>{{서적 인용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 장남 : [[한용성]](韓鏞成, [[1925년]] [[1월 13일]] - ?), [[공군]][[소령]]
  • 한석명 . . . . 1회 일치
         이때 여러 경찰서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한 것을 계기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얼마 뒤에는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다. [[경상남도]] [[창녕군]]과 [[부산부]] 등지를 거쳐 경남 도경찰의 고등과 형사로 재직했다. [[1925년]]에는 경시로 승진하여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다루는 직책인 경상남도 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 허진(법조인) . . . . 1회 일치
         [[191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판사·검사고시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부터는 [[대구광역시|대구]]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 황석두 . . . . 1회 일치
         | 제목 =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 황옥 (1885년) . . . . 1회 일치
         황옥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형에 처해졌다([[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년 [[김지섭]]이 [[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이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년 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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